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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한 나라, ‘적도’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이름 그대로 지구 적도 위에 자리한 에콰도르Ecuador 최초의 성인이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이다.
  그는 1854년 11월 7일 에콰도르 쿠엥카의 존경받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에콰도르는 16세기부터 100년 넘도록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독립전쟁에 참전한 유명한 장군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이다.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페브레스 코르데로도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5개 국어에 능통하여, 미카엘이 태어날 즈음에는 쿠엥카의 신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 아나 무뇨즈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형제자매는 열여덟 명이었다. 모두 19명 중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 사제가 되고, 1명은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이 된 것이다. 이들의 성소는 신심 깊은 외가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셨어요"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 발이 기형이어서 다섯 살까지 혼자서는 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가 다섯 살이던 어느 날, 그의 부모는 깜짝 놀랐다. 아들이 뛰어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부모에게 달려와 그랬다.
  “장미꽃이 핀 정원에 아름다운 부인이 서 계셨어요. 하얀 드레스를 입고 파란 망토를 두르신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셨어요. 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분을 따라갔어요.”
  이 사건으로 그의 부모는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아홉 살이던 1863년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의 학교 첫 학생이 되었다. 성 요한 세례자 드 라 살(축일 4월 7일)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1684년에 설립한 수도회이며,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신대륙까지 진출했다. 그 수도회가 쿠엥카에 세운 첫 학교였다. 그는 지식을 늘려가는 학교생활이 좋았고, 수도자들의 삶은 더 좋아 보였고 끌리기 시작했다.
  “수도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언젠가 거룩한 수도복을 입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수사님들과 함께 있는 것이 늘 좋았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사제가 아닌 평수사의 성소는 반대했다. 그는 마음을 접고서 부모의 뜻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몇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심하게 앓아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도자라는 아들의 성소를 인정하였다.

저술가, 교육자, 학자

1868년 3월 24일 그는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으면서 수도명 미카엘을 받았다. 그 수도회 최초의 방인 입회자이며 수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지만 언어 재능은 뛰어났다. 그래서 학교에서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다. 10대인 그때부터 책도 쓰기 시작하여 20세에 낸 처녀작이 스페인어 문법 교재인데,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러 학교에서 스페인어 교과서로 사용할 정도였다.
  프랑스어와 영어로 된 수도회 자료와 책들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도 그에게 맡겨졌다.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프랑스에서 설립되어 모원이 프랑스에 있으니 그의 언어 재능은 수도회로서는 축복이었다. 그는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번역과 저술에 매달렸다. 그의 명성을 듣고 유럽 교회에서 그를 자주 초청하면서 유럽 각국도 다녀야 했다.
  마침내 그는 카스티야Castilla 에스파냐어 연구에서 특출한 명성까지 얻었다. (주. 카스티야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통일 국가가 되기 전 여러 왕국 중 하나이다.) 스페인어가 공통언어인 에콰도르에서 그의 스페인어 저술은 모든 학교의 필수 교재가 되었다. 그는 1892년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된 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 프랑스 학술원, 베네수엘라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책을 쓰고 번역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매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언제나 온화했고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런 업무적인 것들에만 유능했다면 결코 성덕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거룩한 이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거룩한 수도자

수도자로서 미카엘 수사의 삶은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깊어갔다. 그 바쁜 일상 중에도 묵상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는 깊어지고 그분과의 거리는 나날이 좁혀졌다. 교회 안팎에서 학문적 명성을 얻는 것 못지않게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신심도 탁월했다.
  그의 첫째가는 기쁨은 그 무엇도 아닌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현대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이 필요하시기에,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을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미카엘 수사의 첫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하는 우리 에콰도르의 형제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변질되는 외적 아름다움의 은총을 받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구부정했다. 용모는 어두웠고 여위었으며, 금욕 실천과 지병으로 인한 주름살이 깊은 고랑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그의 영혼과 하느님 은총의 조명으로 인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평화롭고 친절한 본성에서 나오는 온순함이 흘러넘친 까닭이다. 매우 가는 입술은 늘 은총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은 가장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었으며, 복음서의 그 설명할 수 없는 평화에서 기인할 수밖에 없는 고요함과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의 생김새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함은 조용하고 침착한 정신이 그 밑에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영원의 세상으로

1909년 7월 2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어 수도원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 무렵 미카엘 수사는 과중한 번역 업무와 가르치는 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당시 그가 머물던 스페인의 수도원이 공격을 당하자 수도자들은 성당에 모셔진 성체를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신속하고도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그러한 일은 이미 병약해진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결국 그는 이듬해 1월 폐렴 진단을 받았고,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선종했다. 미카엘 수사의 선종 소식이 전해지자 생전에 그가 추진하던 일을 도와주고 지지하던 많은 나라의 신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선종 직후부터 고국에서는 물론이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사람들에게까지 그에 대한 신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술가로서,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수도자로서 미카엘 수사의 성덕이 향기를 풍긴 까닭이다.
  그가 선종한 지 26년이 흐른 1936년 스페인은 내전이 한창이었다. 그해 7월 21일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묻혀 있는 수도원을 약탈하면서 그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을 보고 약탈자들은 달아나버렸다.
  1937년 2월 5일 미카엘 수사는 관에 누운 채 고국 에콰도르로 돌아왔다. 그날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그의 시신을 모신 행렬이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느 소년 장애인이 미카엘 수사의 관에 손을 대자 곧바로 성하게 되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정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탄생 100주년을 기해 기념물도 조성하는 등으로 미카엘 수사의 거룩한 삶을 기렸다.
  1977년 10월 30일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10월 21일 성인으로 선포되면서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이 되었다. 축일은 2월 9일이다. 그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수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교회는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를 학교의 사도로서,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한 사람으로서, 또한 선교사의 참된 모범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자신에게 보내진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그리스도교인의 정신을 교육시키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여 영웅적으로 그 고통을 나누어 지고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