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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발현성모님에 관한 교리성인의 생애와 사명가톨릭 정보
기도서영성, 신심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은 1631년 5월 18일 폴란드의 남부 지역인 스타리 사케스 인근의 포데그로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파프친스키와 어머니 조피아의 여덟 자녀 중 막내이다. 갓 태어나 세례자 요한(폴란드어로 요한은 얀Jan)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작농이며 대장장이였고, 마을 집행관이자 본당 관리자로 봉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프란치스코 제3회와 묵주기도회의 회원이었다. 어머니는 성모님과 성모님의 어머니인 안나 성녀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인내심과 희생적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요한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요한이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그날, 폭풍우로 인해 물이 불어난 도나우 강을 그의 어머니가 보트를 타고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거센 파도가 뱃전에 몰아쳐 익사할 지경에 처했다. 그 순간 그녀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과 뱃속의 아기를 예수님과 성모님께 봉헌했다. 그녀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이 태어났다. 이 일은 먼 훗날 요한이 지옥이라는 죽음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데로 떨어지는 죄인들을 구하고, 질병으로 죽음의 폭풍우에 흔들리는 환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얻어주는 사명을 구현하는 것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표징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의 삶에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표징이 많았다. 소년시절에 그는 공부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는데 성모님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동급생 중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이 된 것이다. 덕분인지 15세에는 예수회 대학에 입학했으며, 이어서 피아리스트 대학 등으로 진학하면서 청년시절을 학문과 신앙으로 단단히 다졌다.
  그 무렵의 청년 요한은 거무스름한 안색, 눈썹 아래 깊고 생각에 잠긴 눈을 가진 키가 크고 날씬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리비우에 갔을 때 그는 열병에 걸렸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열병이라는 이유로 숙소에서 쫓겨나 잘 곳도 없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어떤 낯선 이가, 천사가 분명한 이가 그를 돌봐주었다. 그 후에도 심하게 아팠던 적이 두 번 더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수도회 입회와 새로운 사명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은 1654년 7월 2일 피아리스트 수도회Piarist Order에 입회하여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했다. 피아리스트는 청소년 교육을 목표로 1597년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명을           ‘예수와 마리아의 스타니슬라우스’로 정했다. 그는 마구간과 헛간을 청소하고 나무를 자르고 설거지를 하는 등 다른 이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수련기 둘째 해에 그는 바르샤바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당시 스웨덴은 주변 국가와 민족들을 침략하여 발트해 제국을 만들면서 폴란드를 침략해왔다. 당시 젊은 신학생이었던 그가 직접 겪고 기록한 내용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스웨덴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기꺼이 피를 쏟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며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수사와 내가 구시가지를 지나가고 있는데, 스웨덴 군인이 칼을 들고 우리를 공격했다. 동료 수사는 독일인이었는데 공격을 피해 도망쳤고, 나는 무릎을 꿇고 내 목을 내밀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로, 상대가 내리친 강한 칼날을 세 번이나 받고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다만 1시간 30분가량 심한 통증이 지속되었다.”
  1656년 7월 22일, 그는 피아리스트의 첫 폴란드 출신으로 수도서원을 했으며, 1661년 3월 12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후 강론을 위해서, 고해성사를 위해서 곳곳에서 그를 초대했다.
  그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피아리스트 수도회 설립자의 영성과 규칙을 충실히 지키고 열렬히 옹호했다. 반면 규율을 약화시키는 흐름에는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동료들이 그를 선동죄로 고발했고 그 결과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수도회 총장은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그는 혐의를 벗고 폴란드로 돌아왔지만 결국 외딴 곳에 끌려가 몇 달 동안 감금되었다. 이 기간을 그는 “순교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그렇게 감금되어 있을 때 그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힘과 도우심을 구했다. 그때의 체험과 복음에서 발췌한 주님 수난 내용을 바탕으로 그는 《수난의 그리스도Christus Patiens》를 썼다. 내분된 수도회에 대한 애정과 평화를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결국 수도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1670년 12월 11일 퇴회하면서, 그는 장상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 그리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께 제 마음과 영혼과 육신을 바칩니다. 그리하여 저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종이 되어, 원죄 없는 잉태의 마리아 사제회에서 제 삶이 다하도록 열정적으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성모님 덕분이다”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의 유해를 들고 있는 이 여성은 성인의 전구로 치유되었다.

1670년 ‘원죄 없는 잉태의 마리아 사제회’라는 명칭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폴란드에서 설립된 최초의 남자 수도회이며, 이름 그대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목적이었다.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성모님의 도움을 받았던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의 모토는 이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성모님 덕분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 다음으로는 성모님 안에서이다.”
  하여, 새로운 수도회를 시작하며 그는 이렇게 서약했다.
  “저, 예수와 마리아의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는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 저의 마음과 정신과 이성과 기억과 의지 그리고 저의 육신을 한 점 남김없이 봉헌합니다. 이 순간부터 저는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것입니다.”
  그는 깊은 묵상기도에서 길어 올린 것을 글로 옮기고 책으로 남겼다. 그리고 기도에 희생을 더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로, 고국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바쳤다. 천부적 재능을 지닌 신학자, 교육자, 설교자, 공동체 조직자, 그리고 영성생활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생전에 따라다녔다. 교황이 되기 전의 이노센트 12세의 고해사제였고, 폴란드의 얀 3세 소비에스키 국왕의 조언자였다. 또한 그는 열렬한 애국자였다. 폴란드와 유럽이 통합을 이루기 위해 분투할 때 그는 이런 글을 썼다. “국가들 간의 평화와 일치를 성공시키려면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하느님 없이는 결코 참된 사회정의도 없고 지속적인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의 영성생활에서 성체신심은 특별하고 중요하다. 다음은 성체성사와 성체흠숭의 본질에 대해 그가 쓴 글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대를 잊지 않고 계심을 명심하라.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그분을 그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 그분께서 제대 위에 빵의 형상 안에 숨어 현존하고 계심을 그대가 믿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분을 흠숭하고 그대 마음 안에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미하고 지극히 경건하게 받아 모셔라. 그분께서 그대에게, ‘복되도다, 오늘 나를 먹지 못하고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네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들은 너보다 더 많이 나를 위해 고난을 받고, 너보다 더 큰 노력을 하며 완덕을 구한다.’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도록 지금 행동하라.”
  이 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극한 겸손과 정결과 신앙과 사랑과 소망으로 성체를 영하십시오. 그러면 위로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 오, 이런 양식이 또 어디 있으랴! 생명의 양식! 오, 우리의 영혼을 내적으로 정화시키고 동시에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복된 양식이여! 병을 비켜가게 하고 새로운 힘을 주는 양식! 치료약이며 음식! 육신이 음식에서 양분을 얻고 부족하면 약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그렇게 우리의 영혼에 양분을 줍니다. 우리가 그 양식을 자주 충분히 모시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은 힘을 잃고 쇠약해지고 수척해집니다. 성체는 참으로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성체는 영혼에 양분을 주고 영혼을 지탱해주며 죽음에서 구해줍니다!”(영적 권고)

기적의 성인”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신부의 전구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폴란드 엘크의 사도들의 모후 성당

성당 안에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다.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은 생전에 이미 특별한 전구자였다. 고행과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채워진 그의 삶은 동시대 사람들 눈에 분명 자신들과 하느님 사이의 훌륭한 중개자였다. 그래서 몹시 아플 때나 부득이하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그에게 기도를 청했다.
  그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에 이미 숨이 끊어졌던 아이들이 살아난 경우들도 있었다. 마차에 치인 그 소년을 위해 기도한 후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라고 하자, 죽어가던 소년이 일어나 성당으로 들어갔다. 라시보르츠에 사는 그 엄마는 이미 숨을 거둔 딸을 그에게 데려왔다. 그는 성전 중앙에 있는 탁자에 아이를 눕혀두고는 미사를 집전했다. 그런데 거양성체 때 그 아이가 살아났다!
  공중에 뜬 채 기도하고 있는 그를 본 사람도 여러 명이었다. 그는 예언의 은사도 있었다. 그래서 “기적의 성인”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리고 1701년 9월 17일 고라 갈바리아에서, 거룩한 사제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는 거룩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오랫동안 그의 시신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2007년 9월 16일 시복되었으며, 2016년 6월 5일 성인(축일 9월 17일)으로 선포되었다.

생명의 수호자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성인 생전에도 그랬지만 사후에도 그의 전구를 통해 초자연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히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보호자로, 태어나서 늙어 자연사할 때까지의 생명의 수호자로 공경 받고 있다. 자식을 원하는 가정과 태아들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특히 놀라운 기적이 2001년과 2008년 엘크에 있는 사도들의 모후 성당에서 일어났다. 그 성당은 지속적인 성체조배가 행해지는 폴란드의 12개 본당 중 하나이며, 폴란드에서 가장 작은 본당 중 하나이다.
  첫 번째 기적은 2001년에 있었다. 그 1년 전에 유산한 적 있는 여성이 다시 임신했지만 2001년 3월 22일 합병증과 유산의 위기에서 엘크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세 번의 초음파 검사를 받고 퇴원과 입원을 반복했지만 양막이 28mm로 줄어들어 있었고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았다. 그건 태아가 죽었다는 의미다. 의사들은 약품을 이용해서 자연유산을 준비하라고 환자에게 권했다. 초음파 추적검사에서도 태아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3월 28일, 가족과 친구들이 아기를 살려달라고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의 전구를 청하는 9일기도를 시작했다. 9일기도 8일째인 4월 4일,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태아가 양막 안에 42mm로 자라있었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다른 장비로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아기가 살아난 것이다. 10월 17일,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다.
  나중에 그녀는 다른 합병증 없이 임신해서 또 아기를 낳았다. 그러니까 두 기적이 겹쳐 일어난 것이다.  태아가 살아난 것, 합병증을 가지고 있던 산모가 치유된 것! 이 기적은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신부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인정되었다. 이 기적이 시복심사과정의 발판이 되었다.
  두 번째 기적은 2008년에 일어났다. 20세 여성을 진찰한 의사들은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결혼 날짜까지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도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던 그녀는 결국 기절했고 약혼자가 그녀를 안고 병원에 데려왔다. 그녀는 폐 병동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곧이어 집중치료실로 옮겨져 거기서 35일 이상을 보내게 되었다. 폐렴과 폐렴구균감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심각한 호흡부전으로 진척되어 여러 기관이 손상되고 패혈증 쇼크가 일어났다. 인공호흡기가 부착되었다. 약물로 인한 혼수상태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20일 후, 그녀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회복될 가망이 거의 없다고, 상황이 바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딸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이런 비극 앞에서 가족들과 본당의 모든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1년 전에 파프친스키 신부의 시복식을 경험한 그들에게 그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복자품에 오른 신부의 전구를 청하는 9일기도가 성주간 수요일에 시작되었다.
  9일기도 마지막 날, 환자의 상태가 예상치 않게 호전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혼수상태를 벗어났고 의사는 그녀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호흡부전과 그로 인한 혈관장애가 모두 사라졌다. 흉부엑스레이에서는 폐렴과 심각한 호흡부전 후에 나타나는 어떤 염증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엑스레이는 갓난아기처럼 깨끗한 폐를 보여줬다. 환자가 엄청난 애연가임에도 불구하고 폐에는 석회화나 섬유증의 작은 흔적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녀는 담배를 끊었다. 회복은 완벽했고 지속적이었으며 질병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어떤 심각한 부작용도 없었다.
  그녀는 파프친스키 신부의 전구를 청하는 9일기도가 바쳐졌을 때 죽음의 문턱에서 치유되었다. 전문 의료진들에 따르면 그녀의 의학적 회복은 불가능했다! 로마에서 열린 의학자문위원회는 그녀의 회복이 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으며 기적적인 것이라고 인정했다. 시성성은 파프친스키 신부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기적으로 인정했다. 이 기적이 그의 시성과정의 발판이 되었다. 마침내 2016년 6월 5일, 교회는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