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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나의 충실한 종이다.” 하느님에게서 이런 찬사를 들은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는 1888년 11월 1일 현재는 벨로루시 지역인 발로진 인근 노보사디의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사명을 받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성녀의 영적 지도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청년 소포치코는 1910년 빌니우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6월 15일 사제서품을 받았다.(빌니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다. 전쟁 후 리투아니아소비에트연방의 수도였다가 현재는 독립국 리투아니아의 수도이다.)
  사제서품 후 그는 빌니우스에서 사목생활을 시작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는 바르샤바와 빌니우스를 오가며 군목을 겸했다. 1926년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빌니우스의 신학교에서 영적 지도자로, 인근의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에서 교수로 살았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와의 만남

파우스티나 수녀를 만나기 전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는 활기차고 매우 영적인 사제이면서 매우 행복하게 사목생활을 해나갔다. 학문과 사목 현장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933년 1월 1일부터는 빌니우스에 있는 ‘자비의 성모 수녀회’ 상임 고해신부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소포치코 신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곳의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이미 말씀과 환시로써 그를 보여주셨다.
  “… 이것저것 변동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정해진 고해신부가 없었고, 게다가 이런 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크나큰 은총을, 곧 영적 지도자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이 기도는 내가 종신서원을 한 후 빌니우스에 갔을 때에야 겨우 응답을 받았다. 그 사제가 바로 소포치코 신부님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빌니우스에 가기 전에 벌써 내적 환시를 통해서 그분을 미리 보게 해주셨다.”(파우스티나 성녀의 일기 34)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눈에 보이게 나를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얼마 후에 나는 빌니우스에서 그 약속된 도움이신 소포치코 신부님을 만났다. 고맙게도 나는 빌니우스에 도착하기 전에 내적 환시를 통해서 이 신부님을 보았다. 어느 날 나는 우리 경당에서 제대와 고해실 사이에 서 계신 소포치코 신부님을 보았고, 갑자기 내 영혼 안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제가 지상에서 네게 눈에 보이는 도움을 줄 것이다. 네가 이 지상에서 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가 너를 도울 것이다.’”(일기 53)
  그리고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의 영혼 안에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나의 충실한 종이다. 이 지상에서 네가 나의 뜻을 성취하도록 그가 도와줄 것이다.”
  소포치코 신부는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는 크나큰 사명을 받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 것이 분명하다.
  “소포치코 신부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무척 많이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순간들마다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내게 상기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이처럼 특별히 선택하신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크나큰 기쁨을 느낀다.”(일기 63)
  소포치코 신부의 면모는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소포치코 신학박사 신부의 충고들’이란 제목으로 이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를 실천하십시오. 질책을 들을 때 변명을 하거나 잘못을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모를 받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만일 수녀님이 말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큰 고통에 대비해서 수녀님의 영혼을 준비하십시오. 수녀님은 승인과 허락을 거절당하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 진정한 하느님의 사업은 언제나 반대를 당하고 고통을 요구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시면, 조만간 그분께서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동안에 수녀님이 하실 일은 큰 인내심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입니다.”(일기 270)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종

예수님께서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비의 샘에 와서 계속 은총을 퍼갈 수 있는 그릇을 주려고 한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 이 성화가 바로 그 그릇이다.”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온 인류에게 전해지도록 파우스티나 수녀와 온전히 협력했다.
  1931년 2월 22일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특별한 모습을, 오늘날 “하느님 자비의 성화”에 담긴 그 모습을 보여주시며 그대로 그려 세상에 전하라 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완성해줄 화가를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던 중 소포치코 신부의 소개로 1934년 1월 2일 화가 에우게니우쉬 카지미에롭스키를 만나면서 그해 6월에 마침내 성화가 완성되었다. 그 성화를 본 순간 파우스티나 수녀는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자신이 본 예수님의 모습처럼 아름답지 못했기에,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의 붓으로 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
  “소포치코 신부님의 희생과 노력을 보면서 나는 신부님의 인내와 겸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일로 아주 큰 대가를 치렀다. 여러 가지 걱정과 노고뿐 아니라 경제적인 비용도 상당한 것이었는데 신부님이 전부 부담하셨다.”(일기 422)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직접 말하는 데에도 주님께서 소포치코 신부를 지명하셨다.
  “나의 충실한 종(소포치코 신부)에게 부탁해서, 이날 그가 전 세계를 향해 나의 위대한 자비에 대해서 말하고, 누구든지 이날(하느님의 자비 주일) 생명의 샘에 접근하는 사람은 죄와 벌을 완전히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하게 하여라.”(일기 300)
  이 말씀대로 소포치코 신부는 1935년 4월 26일 금요일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처음으로 전했으며, 파우스티나 수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4월 28일,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그날 미사에서는 하느님 자비의 성화도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소개하는 소책자 <하느님의 자비(신학적-실증적 연구)>를 만들어 대주교의 허락(1936년 6월 30일) 하에 처음으로 발간했는데, 1936년 여름이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담은 자비심 성화로 표지를 장식했다. 파우스티나 수녀로서는 힘든 이 출판 작업을 그가 마침내 해내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본격적으로 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두 사람은 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날 소포치코 신부님이 이 문제에 대해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갑자기 동그란 빛이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비록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가끔 신부님을 본다. 특히 그가 피곤을 무릅쓰고 책상에서 일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일기 762)

“그는 내 마음을 본받은 사제이다”

1937년 8월 25일,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방문했다. 하느님의 자비에 드리는 9일기도,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5단 기도, 호칭기도 등을 담은 소책자의 출판을 위해 논의하고 영적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데 파우스티나 수녀와 함께 선택된 그에 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해 8월 30일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내 마음을 본받은 사제이다. 그의 노력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내 딸아, 보아라. 나의 뜻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네게 약속한 것들을 나는 모두 행할 것이다. 그를 통해서 나는 고통 받는 영혼들과 근심 걱정에 싸인 영혼들을 위로해준다. 그를 통해서 내 자비에 대한 공경을 선포하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다. 그리고 이 자비의 사업을 통해서 그가 일생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혼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내게로 가까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서 일한다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영혼들의 죄를 사해줄 수 있지만, 이 자비의 사업으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기 1256)
  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더욱이 세상이 전혀 모르는 주님의 사업을 시작하고 전개하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사업일수록 그에 대항해서 불어오는 폭풍은 더욱더 무섭고 거셀 수밖에 없다.”는 말대로.
  “신부님과 대화하는 중에 나는 그의 영혼이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영혼은 구세주를 닮았다. 신부님은 당연히 위로가 기대되는 곳에서 십자가를 만난다. 그는 많은 친구들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예수님 외에는 진정한 벗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영혼을 이런 식으로 헐벗게 하신다.”(일기 1259)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주님의 일을 진척시켰다. 1938년 2월, 파우스티나 수녀가 생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그때 쓴 일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오, 저의 예수님, 주님의 사업을 크게 진척시키신 소포치코 신부님께 제가 얼마나 많이 감사하고 있는지를 주님은 잘 아십니다. 그분의 영혼은 한없이 겸손하시기에 모든 폭풍을 견뎌낼 줄 알았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했습니다.”(일기 1586)
  그해 10월 5일 파우스티나 수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사업 대부분이 소포치코 신부의 두 어깨에 내려졌다.

사제 중의 사제

1939년 9월 1일, 독일 나치 병력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를 장악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치의 기세가 유럽을 뒤덮으면서, 그리고 소련군대가 폴란드까지 내려오면서 1942년에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를 비롯한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은 빌니우스 인근에서 2년 가까이 숨어 지냈다.
  그런 중에도 소포치코 신부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통해서 받은 하느님의 자비 메시지에 근거한 새 수도회를 세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예수님께서 명하셨고, 파우스티나 수녀가 이미 생전에 환시로 본 수도원이다. 지금의 ‘하느님 자비의 수도회’이다.
  “오늘(1937년 1월 21일) 주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수도원을 내게 영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안에 위대한 영이 계심을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난하고 빈약했다.”(일기 892) 
  “(예수님의 말씀 요약) 이 수도회 안에는 절대로 화려한 건물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 10명이 넘지 않는 소수의 영혼들만이 머물러야 한다. … 수녀들은 하늘 나라와 세상 사이에 서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세상을 위한 자비를 간청한다. 그리고 사제들의 말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또한 비상한 품위를 지녔으면서도 많은 위험에 노출된 사제들이 자신을 흠 없이 지킬 수 있도록,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리도록 간청한다. 이런 수녀들이 많을 수는 없겠지만, 아주 영웅적인 영혼들일 것이다 ….”(일기 536-537)
  한편 1959년 3월 16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 전파를 금지한다는 교황청 결정문이 전달되었다. 폴란드어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면서 잘못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성당들에 걸려있던 자비 성화가 모두 철거되었고,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소포치코 신부는 교황청으로부터 아주 엄한 문책을 받았으며, 이 모든 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역시 파우스티나 수녀를 통해서 이미 예언되고 예정되어 있었다.
  “(1935년 2월) 어느 날, 나는 번개보다도 빠른 내적 환시를 보았다. 그 환시에서, 나의 영적 지도자의 영혼이 큰 고통 중에, 아주 심한 고뇌 속에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극소수의 영혼들만을 이렇게 무서운 불로 다루신다. 그 고통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업에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이 사업이 완전히 허사가 된 것 같은 때가 올 것이다. … 언제? 모른다.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일기 378)
  1968년 크라쿠프의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신중하게 조사하고 검토하여 교황청에 제출했다. 그리고 1978년 6월 30일자 교황청 통고문은 “그 금지 명령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포한다.”는 내용이었다. 파우스티나 수녀가 제안한 형태로 하느님 자비의 신심을 전파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쁜 소식을 소포치코 신부는 들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업을 위한 그분의 손과 발이 되었던 소포치코 신부는 그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가 소련에 잃은 땅 빌니우스를 떠나 비알리스토크에서 신학생들을 기르고,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네 권의 책을 펴내며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리고 1975년 2월 15일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1987년 교황청은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시작했으며, 200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성덕을 공적으로 발표했다. 2007년 12월 1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의 중개로 인한 기적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2008년 9월 28일,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에 있는 하느님 자비의 성당에서 미카엘 소포치코 신부의 시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축일은 2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