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25대 교황 비오 5세 성인은 1504년 1월 17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근교 보스코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이며, 귀족의 후손이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양을 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목동으로 매일을 보내면서도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했다.
마침내 14세 때에 보게라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으며, 1521년 5월 18일 수도서원을 하고 수도명 미카엘을 받았다. 그 후 볼로냐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에는 파비아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16년간 강단에 섰다.
1550년에는 이단자들이 특히 많은 스위스 국경 지대 코모와 베르가모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이단과 이설異設 종교 재판에 깊이 관여하면서 이단을 몰아내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1556년에는 수트리와 네피 지역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557년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이단과 이설을 심문하는 대심문관으로 일했다. 이듬해에는 검사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교리를 완전히 몰아내고 없애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리고 1565년 12월 9일 당시 교황인 비오 4세가 서거하면서, 12월 19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수도자 그리고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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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5세와 그의 착좌식 |
1566년에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추기경은 전임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직에 오르면서 교황명을 비오 5세로 정했다. 교황이라는 직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지만, 교황직에 오른 후에는 수도자로서 그리고 교회의 최고권자로서 당시의 어수선한 교회 상황을 정화하고 정리하는 데 열의를 쏟았다.
교황 비오 5세는 교황 이전에 이미 수도자로 50년간 살았기에 수도자로서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았다. 교황 즉위식을 마다하고 그 모든 경비를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수도원에 기부하였다. 교황복도 새로 맞추지 않고 선임 교황들의 의복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교황청의 다소 호화로운 의식주를 간단하고 검소하게 정립하여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항상 영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였으며, 홀로 식사를 했으며, 교황 복장 속에 수도복을 입고 지냈다.
교황 비오 5세는 자신의 지인이나 가문의 사람을 임용하거나 특혜를 베푸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 동물 학대와 신성모독적인 일과 매음 행위를 규제하였다. 교황과 교황청에서부터 정화와 개혁의 시발점이며 중심이 되었다.
당시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는 1517년부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교회 분열로 인한 어수선한 상황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는 독일에서, 츠빙글리에 의해서는 스위스에서, 칼뱅을 통해서 프랑스로 프로테스탄트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 분열을 자초하게 된 교회 부패, 신생국들 사이의 치열한 갈등과 분쟁, 오스만 민족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교회는 교리를 재정립하고 제도를 개혁하고 쇄신하려는 목적으로 1545년 12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는데, 트리엔트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가 막을 갓 내린 시점에 교회 최고권좌에 오른 교황 비오 5세는 즉위와 동시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고 실천하여 교회를 철저히 개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개혁 그리고 개혁
교황 비오 5세의 개혁은 추기경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 개혁을 실시하면서 종교적 윤리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에게 교회 개혁의 소명을 맡겼다. 공의회의 개혁 규정들을 각 교구에서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했으며, 성직자 특히 주교들이 자신의 임지를 떠나 무단으로 장기 출타 시에는 교회록과 재치권을 박탈하기까지 했다. 수도회들을 정비하고 신학교를 세웠으며, 지역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성직자들의 회의를 독려했다.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구제 사업을 시행했으며, 가난한 수도원에도 정기적인 도움을 주었다.
교황 비오 5세가 이룬 교회 개혁에서 가장 큰 업적은 전례서들의 개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1566년에 《로마 교리서》를 출판하면서, 젊은이에 대한 교리 교육은 모든 본당 사목자들의 의무이며 성인들은 세례받기 전에 충분한 교리 교육을 받도록 규정했다. 1568년에는 《로마 성무일도》를, 1570년에는 《로마 미사 경본》을 출간하여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로마 미사 경본》의 발간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사는 라틴어로만 거행되며, 제대는 제단의 벽을 향해 놓이고 집전자와 신자들은 그 제대를 향하기에 집전자는 신자들에게 등을 돌린 상태이다. 성체는 무릎을 꿇고 혀로 받아 모시며, 경문이 매우 길고 장엄했다. “비오 5세 미사”라고도 불리는 이 미사 양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 의해 전례 개혁이 있기까지 거의 400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1567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교회박사로 공포하고 그의 전집 17권을 세상에 내놓아 교회 개혁과 영성에 이정표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1569년에는 불가타Vulgata 성경의 새 출판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불가타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이 신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인데, 구약성경의 번역 원전을 70인역이 아닌 히브리어 원전으로 다시 번역하기 위한 계획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속죄를 위한 대사 규정을 엄격하게 재정립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로마의 성당들을 방문했는데 때때로 맨발이었다고 한다.
이단을 없애기 위해 종교 재판에 엄격한 규칙과 실천사항들을 제시했으며 그 재판에 직접 참석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이탈리아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했다. 1571년 3월에는 ‘금서 목록 개정 및 서적 교정성’을 설립하여 출판 전 검열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묵주기도의 방법 정립
중세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신대륙에 선교하는 데 묵주기도를 이용했으며 묵주기도 신심을 널리 전하였다. 그리고 식스토 4세 교황(1414-1484년)과 인노첸시오 8세 교황(1432-1492년)과 알렉산드로 6세 교황(1431-1503년)은 묵주기도의 형성에 기여하고 보급에 공헌한 도미니코 성인을 따르는 수도자들의 활동을 적극 권장하며 묵주기도에 대사를 부여했다. 당시에 도미니코회는 “어디서든 묵주기도에 관해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묵주기도의 방법은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비오 5세는 묵주기도 형식에 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는 1569년 9월 17일 “묵주기도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칙서 <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를 반포했는데, 묵주기도를 바치는 형식을 언급한 첫 교황 문헌이다. 지금까지 내려온 묵주기도의 방법들이 여기서 정리되었다.
“‘묵주기도’ 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모 시편’이라 불리는 이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신심 깊은 기도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쉽게 따라 바칠 수 있는 기도이며, 다윗의 시편처럼 150번 반복되는 ‘천사의 인사말’(성모송)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공경을 표하게 됩니다. 또한 매 단의 시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이러한 기도는 정해진 주제들을 통해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을 설명하며 묵상하게 됩니다.”(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 1항)
“열렬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은 이러한 신비 묵상을 충실히 따라 기도하면 믿지 않는 이들을 변화시키며, 이단의 두려움들을 물리치고 가톨릭 신앙의 빛을 새롭게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선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 너무 많은 이단들로부터 위협당하는 교회를 직면하게 되며, 잦은 전쟁에 고통당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희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권고하면서 주님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도와주시는 힘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 2항)
묵주기도로 얻은 레판토 해전의 승리
교황 비오 5세는 재임 기간에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으로 인한 분열과 오스만(터키) 민족의 침략 위협에 맞서고 그 위험에서 교회와 유럽을 지키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570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파문한 것도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묵주기도 칙서를 선포한 직후부터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대비해야 했다. 오스만 족은 13세기부터 세력을 키워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면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였다. 16-17세기에는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급성장했으며 이슬람으로 무장하여 유럽 그리스도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비오 5세는 스페인과 베네치아와의 동맹을 결성했으며 하느님의 도움에 의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때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지만 특히 오스만 제국의 야욕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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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과 제단 |
그의 염려는 1571년 10월에 현실화되었다. 그리스 서부 지역인 레판토 해안까지 올라온 오스만 이슬람 세력과 그리스도교 군대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전쟁에 참전할 군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과 함께 도미니코 수도회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 성당에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전력으로는 오스만 세력에 비해 훨씬 약했던 그리스도교 군사력에 바람의 방향이라는 하느님의 도움이 더해지면서 그리스도교 군대는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0월 7일이었다!
한편 그 승리의 시각에 교황 비오 5세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시를 통해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동맹군의 승전보가 로마에 전해진 것은 그날로부터 19일이 지난 26일이었으며, 그날 교황 비오 5세는 공적으로 동맹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라는 칭호를 로레토 호칭기도에 첨가했으며,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기념일’로 선포했다. 이 기념일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10월 첫 주일 ‘묵주기도의 모후 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교황 글레멘스 11세에 의해 10월 7일로 고정되었다.
이 승리의 날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1883년 9월 1일 교황 레오 13세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이 신심의 효과와 힘은 오스만(터키)의 막강한 군대가 거의 유럽 전역에 걸쳐 미신과 야만의 멍에를 지우려고 위협하던 16세기에 놀랍게 발휘되었습니다. 그때 교황 비오 5세는 모든 그리스도교국 제왕들 간에 공동 방어의 열의를 일으키고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국을 위하여 하느님의 지극히 능하신 어머니의 도우심을 얻으려고 불타는 열망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드러나게 된 가장 탁월한 예는 그 시대의 모든 정신과 마음을 그 교황 주변에 규합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성실한 무사武士들은 그들의 신앙과 나라의 복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 피를 흘릴 각오를 하고 적과 싸우기 위하여 두려움 없이 ‘코린토’만을 향하여 돌진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을 단결시킬 수 없었던 그들은 하나의 기도 협력단을 만들어 마리아를 불렀고, 한 사람은 묵주기도로 마리아에게 거듭 인사하며 승리를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교전에 임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도움을 내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에키나데스 섬 근처 해전에서 그리스도교 함대는 크게 파괴됨 없이 적을 완전히 격퇴하여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회칙 ‘Supremi Apostolatus’, 서문)
생애의 대부분을 분열과 오류와 이슬람 세력과 맞서 싸워야 했던, 그러면서도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던, 뜨거움과 엄격함을 겸비했던 교황 비오 5세는 1572년 5월 1일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오, 주님, 저에게 고통과 인내를 더하여 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교황 비오 5세의 시신은 1588년 1월 9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모 마리아 대성전으로 옮겨져 화려한 장식 가운데 안장되었다. 1672년 5월 1일 시복되었으며, 1712년 5월 22일 시성(축일 4월 30일)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