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성녀는 1474년(또는 1470년) 3월 21일 이탈리아 북부지방 브레시아 근처 데센자노의 귀족인 메리치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아 의지가 강하고 어머니를 닮아 신앙심이 두터웠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었으며 성인들의 삶에 감명을 받아 그대로 실천하려 애썼다. 복자품 심의 과정에서 이런 증언이 있었다.
“안젤라 메리치는 5세 되던 무렵에 벌써 아버지에게서 들은 성인들의 삶과 같은 영적이며 관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다.”
13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안젤라는 하느님께 맹서했다, 평생 동정을 지키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안젤라는 그 서약을 죽기까지 지켰다.
15세 때 안젤라는 ‘브레시아 시민’(Civis Brixiae)이라는 귀족 작위와 넓은 땅을 가진 영주였던 아버지 조반니 메리치와 어머니를 연달아 여의고 쌍둥이처럼 자라던 언니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외삼촌 집으로 옮겨갔다. 외삼촌이 속한 비안코시 가문은 다소 하급 귀족이었고, 그곳 살로 지역은 유명한 휴양지였기에 비도덕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가 넘쳐났다. 그것은 예민한 감수성과 순수한 품성을 소유한 안젤라의 정신과 영혼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안젤라는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했다. 또한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하여 기도와 가난과 극기의 생활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면서 자기 자신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속죄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했다.
20세 무렵 부모를 대신하여 자신을 돌보아주던 외삼촌이 사망한 후 안젤라는 고향 데센자노로 돌아왔다. 상속받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특히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브레시아의 안젤라"
1497년-1498년경이었다. 그날 안젤라는 브루다초의 들판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머리를 장식한 동정녀들이 안젤라의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들 중에는 죽은 언니도 있었다. 언니나 친구로 보이는 한 동정녀가 안젤라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다.
“선택받은 동정녀들의 모임을 브레시아에 만들어라.”
이 말을 전한 다음 그들은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후일 “브루다초의 계시”(Vision di Brudazzo)라고 불린 이 환시는 안젤라의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었다.
그러던 중 데센자노에 휴양 온 브레시아의 귀족 파텐골라 가족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두 아들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브레시아를 방문했다가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가 1516년이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이탈리아 국가가 아니었다.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으로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현재와 같은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가들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안젤라 성녀가 살던 시기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도 전쟁이 잦았다.
밀라노와 베라노 사이에 있는 브레시아는 특히 전쟁의 여파가 심각했다.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으며, 성생활은 문란했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조차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다. 또한 상류층의 지나친 부와 사치에 비해서 서민들의 살림은 매우 궁핍하여 그들의 자녀들 중에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구걸하며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실상을 직접 목격하면서 안젤라의 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안젤라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속죄와 금욕 생활을 철저히 행했으며, 데센자노에서처럼 청소년들을 모아 신앙 교육을 시켰다. 윤리 도덕의 무질서와 문란함은 신앙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교육을 통하여 가정과 사회를 그리스도화함으로써 윤리 도덕을 바로잡고 인성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안젤라는 특히 모든 계층의 소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동정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그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안젤라의 삶과 존재 자체는 브레시아 사람들 모두에게 모범과 선망과 자랑이 되었다. 안젤라의 영향력은 청소년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안젤라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면서 그의 영적 지도를 청했다. 이런 사례가 있다.
브레시아의 백작 두 사람이 수년간 불목하며 원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누구의 중재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하게 마주하게 된 두 사람에게 안젤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두세 마디 말을 더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포옹하고는 용서의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그 후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순결하게 살았고, 기도 생활에 충실했으며, 가난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도 부드러움과 현명함과 모성적인 자비로움이 넘쳤던 안젤라는 그래서 “브레시아의 안젤라”(Angela di Brescia)로 불렸다.
"선택받은 동정녀들의 모임을 브레시아에 만들어라"
안젤라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녀의 그늘 아래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던 즈음인 1524년 50세가 된 안젤라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나섰다. 하지만 성지에 도착하기 전 크레타 항구에서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안젤라는 포기하지 않고 여정 내내 열렬하게 기도하면서 성지 순례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순례에서 돌아오는 도중 칸티아의 기적의 십자가상 앞에서 다시 눈을 뜨는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안젤라가 하느님의 이끄심에 더욱 의지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525년 교황 글레멘스 7세가 특별 성년을 선포하고 순례를 권장했을 때 안젤라는 로마를 방문하여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려는 뜻을 전하면서 교황의 허가를 청하고는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526년에 카알 5세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1528년에 브레시아가 점령되자 안젤라는 크레모나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한 병을 앓았는데, 모든 사람이 그녀의 죽음을 예견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파텐골라 부인은 안젤라를 위한 묘비명까지 준비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젤라는 탈혼의 신비 체험을 한 후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1529년에 안젤라는 성모 성지인 바랄로 산을 순례하고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평화의 제물로 봉헌했다.
1530년에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식되자 안젤라는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전쟁의 여파는 심각했다. 사회 기강은 무너졌고 성병인 매독이 젊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여자나 어린 소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젤라는 병원을 드나들며 그들을 간호하였고 가정을 방문하여 물질적 영적 도움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1532년 무렵에 안젤라는 성병에서 회복된 미혼 여성들과 소녀들이 기거할 수 있는 집을 마련했는데 마련하기가 무섭게 초만원을 이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그들이 자기 집에 그대로 살면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안젤라와 그를 돕는 동정녀 선생들이 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신앙과 순결 등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일을 통해 우르술라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안젤라 자신은 어떤 단체나 수도회를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달랐다.
최초의 여성 활동 수도회 탄생
“브레시아의 안젤라”의 활동이 커지면서 그녀를 따르며 돕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그들 중 안젤라와 전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동정녀들이 1531년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1532년에는 바랄로 산으로 성지 순례를 가서 보리수나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들을 봉헌하고는 “겸손한 이들”(dimes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1535년 11월 25일 안젤라 메리치를 포함한 “겸손한 이들” 28명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며 안젤라가 만든 규칙에 따라 정결, 청빈, 순명을 서약하고 ‘성녀 우르술라의 동정녀회’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우르술라의 동정녀들은 가족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가정, 곧 하느님께서 그들을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인 세속에서 동정 생활을 하면서 수도복이 아닌 단순한 복장의 평범한 모습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돌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었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진리와 신앙을 가르치며 그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일에 전념하였다.
우르술라회의 정신과 활동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는 14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체로 퍼져가던 르네상스의 물결로 교회는 물론이요 사회 전반에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교회도 세속화의 역풍을 맞고 있었던 때였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본업에 게으르고 문란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젤라 메리치의 우르술라회는 세상 안에서 사도적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급격하게 세속화되어 가던 유럽 사회에 긴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54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우르술라회를 교회 안의 수도회로 인가했는데 이로써 여성 활동 수도회 그리고 단순 서원 수도회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 우르술라회는 청소년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크게 기여한 여자 수도회로 성장하였으며, 우르술라회 또는 안젤라 메리치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회가 많이 생겨났다.
1540년 1월 27일이었다. 우르술라회의 설립자 안젤라 메리치 수녀는 한 묶음의 볏짚 위에 누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헌을 행했다. “성부여,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성 아프라 성당에 묻혔다. 1768년 교황 글레멘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되면서 “우르술라회의 설립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962년에는 자신의 고향 데센자노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