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관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1월 7일 폴란드에서 태어나 ‘라이문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막시밀리아노’는 수도명이다. 그의 부모는 매우 가난한 노동자였지만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또래 아이들처럼 활발하고 고집도 센 개구쟁이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가 열 살이던 해 어느 날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 꾸지람은 어린 라이문도의 영혼을 깊이 뒤흔들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변했다.” 체스토호바의 성모 제단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며 눈이 빨갛게 부풀도록 울기를 자주 했다. 아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을 붙잡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라이문도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도대체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라고 했을 때 저는 정말 슬펐어요. 그래서 성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저는 뭐가 되겠나요?’ 하고 물어보았어요. 그 후 성당에 가서도 그렇게 물었어요. 그런데 성모님이 관을 두 개 들고 제게 나타나셨어요. 흰색 관과 붉은색 관이었어요. 성모님이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시면서 ‘어느 관을 갖고 싶니?’ 하고 말씀하셨어요. 흰색 관은 순결을, 붉은색 관은 순교를 나타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둘 다 주세요.’라고 말씀드리니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어요. 그때 이후로 성당에 갈 때는 엄마 아빠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성모님과 요셉 성인과 함께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훗날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이렇게 뒷받침했다. “라이문도가 완전히 변한 것을 보면 이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라이문도는 정말 딴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내게 눈을 반짝이며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습니다. 순교는 라이문도의 꿈이었나 봅니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아버지 혼자서는 생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어머니도 장사를 하면서 산파 일도 하고 있었다. 세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어 첫째만 상업교육을 마친 뒤 신학교에 보낼 작정이었고 둘째인 라이문도는 학교교육이나 사제의 꿈을 포기하고 집에서 가계를 돕게 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자기가 간호하던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사오도록 라이문도를 심부름 보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라틴어 처방을 단숨에 외어 약사에게 달려가 말했다. 그러자 약사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그 말을 고 있지?”
“야코프스키 신부님에게서 라틴어를 배웠어요.”
아직 어리지만 명석한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약사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기 아깝구나. 우리 집에 오너라. 내가 가르쳐줄게. 그리고 금년 말에 형과 함께 신학교 시험을 치도록 해라.”
우연이나 행운이라기보다는 섭리에 의한 것이 분명한 이 만남으로 그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3세 때인 1907년 10월 그는 형과 함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9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수도명을 막시밀리아노로 정했다.
소신학교 시절 그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특히 “전략을 세우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그는 나무로 ‘전략적 단위’를 의미하는 말을 만들어서 장기판 위에 정렬하고는 두 편이 가상 전쟁을 벌이는 놀이를 몇 시간씩 즐기곤 했다. 그래서 “만일 그가 수도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대전략가나 천재적 발명가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친구의 말처럼 그는 끝없이 정복해가는 군인이라는 직업에 강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마음의 여왕인 마리아에게 온몸을 바치는 기사가 되고픈 원의가 매우 컸다. 아마도 이런 성향과 기질이 그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그를 “성모의 기사”가 되게 했을 것이다.
"원죄 없으신 성모" 발견
1912년 11월에 콜베 수사는 로마에 도착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원인 모를 부스럼이 생겨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고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의사는, 뼈가 썩기 시작했으므로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에 나는 아주 좋은 약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장 신부님이 내게 주신 루르드 물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신부님이 직접 그 물로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 의사도 내 말에 기뻐하며 그 물의 효능을 실험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술하지 않고 약간의 치료와 그 물로 완쾌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감사를!”
그의 기록 중 ‘원죄 없으신 성모님’이란 언급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폴란드인은 대대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애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점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훗날 그가 말한 대로, 성모님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써가 아닌 성모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동료 수사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성당에) 들어갈 때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잠깐 있으면 작은 소리가 들립니다. 그가 중앙 제대 뒤에 숨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14년 7월에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내몰렸으며, 그해 11월에 그는 종신서약을 했다. 그리고 “나는 오만해지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원죄 없으신 성모님은 더욱 강하게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며 회고한 대로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손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드디어 1917년, 세계 역사나 교회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해이다. 이를 증명하듯 성모님은 그해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여섯 번 파티마에 발현하셔서 인류의 운명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프랭크 더프는 이즈음에 4년 후 레지오 마리애로 가시화될 영성의 기틀을 닦고 있었다. 그리고 성모님의 염려대로 러시아 왕정이 무너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이 러시아에 들어선 것도 1917년 11월이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극점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반교회 비밀결사대인 프리메이슨은 1917년 6월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서 “사탄이 바티칸을 지배해야 한다. 교황은 우리의 노예가 되라.”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특히 이 사건은 콜베 수사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프리메이슨이 더욱 대담해지고 난폭해져서 루치펠이 대천사 미카엘을 짓밟는 모습을 검은 바탕에 그린 깃발을 바티칸의 창 앞에까지 내세웠을 때, 그리하여 교황을 비난하는 선전문을 배포하기 시작했을 때, 이 프리메이슨과 루치펠의 다른 앞잡이를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 탄생
이런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며 콜베 수사는 동료 수사들을 독려했다. “보십시오! 교회의 원수들이 우리를 쳐 이기기 위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1917년 10월 16일 저녁 로마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두 개의 촛불 사이에 원죄 없으신 성모상을 모시고, 콜베 수사를 비롯한 7인의 수사들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 MI)를 결성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한 다음 성모님의 보호와 중재로 모든 죄인들, 이교도, 이단자, 특히 반교회 비밀결사 단원들의 회개와 모든 사람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위해 전 세계의 모든 영혼을 하나도 남김없이 획득하기 위해서!
“부진했던 해”인 첫 1년을 보내고 이 사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새로운 회원들이 끊임없이 불어났다.”
한편 1917년에 영화가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은 하나같이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한 것이었지만 콜베 수사는 영화의 기능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사회적 선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영화를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이때부터 그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보호 아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가르칠 잡지의 간행을 꿈꾸었으며 이는 그 몇 년 후 실현되었다.
1918년 4월 28일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 폴란드로 돌아왔다. 폐결핵 증상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의 사도적 열성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오히려 고통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강했으므로.
이 무렵부터 그는 성모 기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2년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또한 교회와 마리아를 옹호하는 <블루Blue>지를 비롯하여 모두 세 종류의 잡지와 하나의 일간지를 발행했다. 이 사업이 열렬한 호응을 얻으면서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게 된다.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이 지날 무렵 그는 아직도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동양 선교를 열망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2월 30일에 폴란드를 떠나 1930년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일본에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세우고 성모 기사지를 발간하였다. 그는 일본에 6년간 머물면서 인도, 중국, 한국에서의 선교도 꿈꾸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저 사형수 대신 내가 죽겠소"
1936년 콜베 신부는 폴란드의 성모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일본 선교를 중단하고 폴란드로 돌아왔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위협 속에 있었고 폴란드 역시 1939년 9월부터 독일 나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특히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성모 마을에 머물게 하여 보호해주는 한편 나치의 만행에 저항했다. 글을 통해서!
1941년 2월 17일 그는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히게 되는데, 이유는 그가 유대인들을 돕고 있었다는 것과 ‘자유’라는 기고문의 내용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 받고 있던 많은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그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그들을 위로해주었다.
그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 라고 불리던 ‘오센침’(독일식 발음이 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그 수용소에서 그는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의 일상은 그곳에서도 중단되지 않았다.
7월 말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콜베 신부가 있던 14호 감방의 한 죄수가 탈출한 것이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죄수 한 명이 도망쳤을 경우 그가 속한 감방 수감자 중 10명은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아사당해야 했다. 그리고 참혹한 운명을 마주한 그들 중소장의 손가락질 지명을 받은 희생자 10명이 가려졌다. 그러자 그들 중 조브니체크는 “아,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어.”라며 울부짖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콜베 신부가 나서며 말했다. “저 사형수 대신 내가 죽겠소.”
소장이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나는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누구 대신에 죽겠다고?”
“저 사람, 부인과 아이들을 가진 저 사람 대신입니다.”
“너는 누구냐?”
“천주교 사제요.” 콜베 신부의 대답은 짤막하면서도 엄숙했다.
<콜베 신부 덕분에 살아 남게 된 F.조브니체크가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콜베 신부는 그 죄수를 대신하여 다른 9명의 죄수와 함께 아사감방에 가게 되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공급되지 않는 그곳에서도 그는 사랑의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다고 후일 교도관이 증언했다.
매일 한두 명씩 죽어나갔다. 그리고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즉 1941년 8월 14일이 되자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만 남아있었다. 결국 그는 독약 주사를 맞고 죽음에 들었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은 “신부의 시체는 깨끗하고 빛을 발하는 듯했다.”고 증언했다.
1948년 5월 24일 콜베 신부를 시복하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로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콜베 성인의 일생은 “하느님의 최대 영광을 위하여”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의해, 전 세계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바쳐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몫을 다함과 동시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속자(代贖者)가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