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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레 비오”(Padre Pio,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 또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로 불리는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 사이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가까이하였다.
1903년 1월 6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현상은 1915년까지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15년 10월 10일부터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다섯 가지 상처)의 흔적이 좀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8년 9월 20일 금요일 아침,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지도 신부인 베네데토에게 보낸 서한에서 오상을 받았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이른 아침, 미사를 봉헌한 후 저는 장궤에서 기도하는 중 단꿈을 꾸는 듯한 졸음에 빠져 들었습니다. 내외적으로, 심지어 제 영혼까지 형언할 수 없는 정적에 빠져 들었고, 저는 완전한 고요로 둘러싸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제 마음은 모든 혼란과 걱정을 잠재우는 평화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이러는 동안 저는 지난 8월 5일에 보았던 사람과 비슷한 신비스러운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단 하나 있다면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모습은 저를 두려움에 떨게 했고 그 순간 제가 느꼈던 것을 자세히 설명드릴 수 없군요. 저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고, 주님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었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그 광경은 사라졌는데 제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 거의 매일 계속되는 이 아픔을 상상해 보십시오. 특히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사이에 심장의 상처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저는 이 상처와 당황스러운 그 결과로 인해 심하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상황에서 저를 해방시켜주시지 않는다면 과다한 출혈로 죽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께서 저에게 이러한 은총을 허락하실까요? 몸 밖에 드러난 표지로 인해 크게 당황하는 저를 주님께서 적어도 자유롭게 해주실까요? 주님의 고난을 함께 겪기를 원하는 이 상처와 고통 때문이 아니라, 저를 크게 당황하게 하고 견디기 힘들도록 창피함을 느끼게 하는 몸 밖의 이 외부 표지를 없애주시도록 저는 계속해서 주님의 자비를 애원할 것입니다.”
그에게 생긴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였으나 몇 달이 지나면서 점점 커졌으며, 이후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은 채 그가 1968년 선종할 때까지 50년 동안 계속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가 선종하기 며칠 전 오상은 사라졌다. 그것은 어떤 의학적 치료도 무의미하고 과학적인 설명도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이것으로 그는 교회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은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그것을 보기 위해,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해 산 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비오 신부는 이것으로 사랑과 관심뿐 아니라 오해와 의혹도 많이 받아야 했다.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을 하지 못하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는 등의 제재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며 순명했다.
1947년 5월 19일,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병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을 산 조반니 로톤도에 세우기 시작했으며 1960년 8월 10일 이 병원은 완공되었다.
1968년 9월 20일, 그가 예수님의 오상을 받은 지 50주년을 맞는 축하 행렬이 있었다. 그 이틀 뒤인 22일 오전 5시에 그는 여느 때처럼 미사를 봉헌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봉헌한 마지막 미사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40년이 지난 2008년 4월 2일에 개장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그의 선종 이듬해인 1969년부터 시복 시성을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 5월 2일 교회는 그를 복자의 품위에 올렸다. 그리고 2002년 6월 1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40만 명의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758번째 성인의 대열에 올렸다(축일 9월 23일).
교황은 이 시성식에서 비오 신부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이렇게 드높였다. “오늘 탄생한 새로운 성인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초대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유일하고 가장 숭고한 선익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 기도와 사랑, 이것은 비오 신부의 가르침을 가장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말이다. … 이 겸손한 카푸친회 수도자가 살았던 십자가의 영성은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것이었던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는 희망을 향해 창을 열 수 있기 위해서 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한편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거행된 그날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 앞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그곳은 그가 1916년 9월부터 살기 시작하여 마지막 숨을 거둔 그날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기도는 우리의 최고 무기 입니다

비오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일 때 폴란드 주교 회의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다음과 같은 증언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 모두가 비오 신부님의 거룩한 삶과 특별한 사명을 확신합니다. 덕행으로 충만한 그분의 훌륭한 삶과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및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과 함께 그분의 끝없는 기도가 그 증거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과 폴란드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는 사도직으로서 수많은 영웅적 희생 및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감탄할 만한 사랑에 찬 그분의 고행의 삶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수도 생활로부터, 수도 사도직으로부터, 그리고 사제 직무의 품위로부터 빗나가고 있는 때에 비오 신부님은 우리 시대의 사제이며 수도자였습니다. 그분은 혼란한 세계에 빛나는 모범이었습니다. …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오 신부는 그 자신이 ‘기도하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고했고, 그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늘 기도를 권했다. “기도는 우리의 최고 무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 기도하십시오. 마지못해서라도 기도하십시오.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적게 기도하는 사람은 위태롭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비오 신부는 특히 묵주기도를 자주 그리고 열성적으로 바쳤다. 임종 이틀 전에 그는 오랜 친구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묵주기도를 바치십시오. 묵주기도는 오늘날 세상의 악과 대적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세상은 태양 없이도 존재 할 수 있지만 미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0년 8월 10일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서품 상본에 이렇게 새겼다. “세상을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주시고, 당신을 위해서는 거룩한 사제가 되고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해주소서. 저를 당신 십자가를 위한 제단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성혈을 위한 성작으로 삼으소서.”
이처럼 그에게 미사는 삶의 원천이며 절정이고 중심이었다. 그의 모든 활동의 중심이었고, 그 자신이 희생 제물 자체였다. 그가 받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자 했던, 주님의 성혈을 위한 성작으로 바치고자 했던 그의 원의가 받아들여진 징표일 것이다.
그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기 전 미사를 준비하는 긴 기도를 바쳤고, 미사 후에도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는 매일 오전 2시에, 또는 그보다 더 이른 시각에 일어나 오전 4시 30분에 봉헌할 미사를 준비했다. 두 시간 반이나 미사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거룩한 영성체를 준비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제가 어느 날 영성체를 궐한다면 저는 그날로 죽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오전 4시 30분에 미사를 봉헌했는데 한 시간 반 가량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를 묻자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제대 위에는 “눈물 손수건”이라는 별명이 붙은 손수건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제대포에 떨어지곤 했다.
미사에 대한 그의 열의, 그의 가치관은 다음의 한 문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세상의 모든 죄를 저지른다해도...

“비오 신부의 삶에 있어서 두 기둥은 제대와 고해실”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미사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의 고해소를 찾아왔고, 그보다 많은 이들은 편지를 통하여 거룩한 조언과 영적지도를 받았다.
그러니 그에게 고해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씩 기다려야 했고, 더욱이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지 않으면, 성사에 신중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엄격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때로 그는 고해자가 빠뜨린 죄와 숨긴 죄를 대신 고백해주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가 받은 초자연적 은총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서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들 대다수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큰 은총을 체험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평화를 누리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은총 중에 있는 한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련한 이 세상이 볼 수만 있다면, 모든 죄인과 불신자들은 그 자리에서 회개할 것입니다.”
1968년 9월 22일, 임종 전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위독한 상태에서도 그는 고해소에서 10여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만큼 고해성사를 위해 헌신했다. 교회의 큰 축일을 앞두고는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고백을 들어야 했다. 1967년 한 해에만 약 15,000명의 여자와 10,000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비오 신부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의 모든 면모가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수많은 영적 육적 기적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을 찾도록 한 귀중한 도구가 되었다.
스페인 출신이며, ‘하느님 사랑의 딸들’ 수도회 창립자인 스페란차 총원장 수녀는 1939년경 비오 신부를 1년 동안 로마에서 매일 아침 만났다고 증언했다. “저는 일 년 동안 매일 아침 (비오 신부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벙어리 장갑을 끼고 다니셨지요.” 그런데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50년 동안 한 번도 로마에 간 적이 없었다.
조반니 사비오는 1949년 2월 15일 카푸친 수도원의 부속 건물을 짓는 공사 중 설치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얼굴이 완전히 화상을 입고 오른쪽 눈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비오 신부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눈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교황이 되기 전인 1962년에 비오 신부에게 편지로 어느 부인의 치유를 부탁했다. 마흔 살 된 그 부인은 네 아이의 엄마인데 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오 신부의 전구로 즉시 완쾌되는 은혜를 입었다.
특히 1992년 불치병이 치유되었던 콘실리아 데 마르티노의 경우는 비오 신부의 시복을 가능하게 한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2000년에 치유된 10세의 어린이 마테오 코렐라의 경우는 비오 신부의 시성을 가능하게 한 증거가 되었으며, 이 두 사람은 비오 신부의 시성식에 초대되었다.
이외에도 비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서 일어난 육적 치유 기적은 여기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예언,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양, 천사들과의 대화, 구마 등 수많은 초자연적 기적들이 그를 통해 일어났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그때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바친 미사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주었던 고해성사 때문이며,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처럼 그는 생전에 결코 영광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통에 더 가까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서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그는 오로지 고통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끌어안았을 뿐이다.
“보십시오. 저는 이기주의자라서 제 고통을 아무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저 혼자 고통을 당하고 싶습니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제 십자가 없이 지내려 한다면 저는 저 자신에게 아주 독한 질책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하였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내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 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이 말은 오상의 비오 신부가 우리 시대의 탁월한 영성가이자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비가”로 추앙받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로톤도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붐비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기적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도 그의 활동은 자신이 예언한 것처럼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